일본에서 판매되는 와인이라고 해서 모두 일본 와인은 아닙니다.
일본 와인 = 일본산 포도만을 원료로 하여, 일본에서 제조한 와인
-과실주 등의 제법품질표시기준 (果実酒等の製法品質表示基準)-
이는 니혼슈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니혼슈도 단순히 일본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모두 니혼슈(日本酒)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처럼
(일본산 쌀을 사용해, 일본 국내의 양조장에서 빚은 청주만이
정식으로 니혼슈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본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일본에서 병입하거나 제조했다고 해서 모두 일본 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자란 포도를 사용했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제조했는지가 핵심입니다.
결국 니혼슈와 일본 와인 모두,
원료의 산지와 제조 장소가 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에 와인이 처음 들어온 시기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른 설이 있기 때문에 정확히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의 기록에는 와인으로 추정되는 친타(珍蛇)라는 술이 등장하고,
또 다른 기록에서는 난반슈(南蛮酒)라는 이름으로 와인과 관련된 술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또한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와인을 일본에 들여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처럼 와인이 일본에 전해진 시기와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술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 들어온 와인은 매우 귀한 수입 술에 가까웠고,
일부 특권층이나 권력자들 사이에서만 접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후 에도 시대의 쇄국 정책으로 와인은 한동안 모습을 감췄다가,
에도 말기 페리가 쇼군에게 와인을 헌상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문명개화의 흐름 속에 정부가 와인 제조를 장려하였고
이때부터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와인이 보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산업적인 와인 양조가 이루어진 것은 1870년입니다.
야마나시현 고후시에 살던 야마다 히로노리와 타쿠마 노리히사가
포도주 공동양조소라는 와인 양조장을 설립한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제조 기술이 아직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몇 년 만에 폐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877년,
일본 최초의 민간 와인 양조장인 대일본 야마나시 포도주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타카노 마사나리와 츠치야 류켄 두 사람이
와인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약 1년 반 동안 와인 양조 기술을 배우고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후에는 미야자키 코타로도 합류하여 본격적인 와인 양조에 힘을 쏟았습니다.
(참고로 이 대일본 야마나시 포도주회사는 훗날 일본을 대표하는 와이너리 중 하나인 Château Mercian의 뿌리가 되는 회사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도전을 시작으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고
와인용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 매진하면서 일본 와인의 기반이 조금씩 다져져 갔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와인 양조가 점차 확산되었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도 와인은 일본인의 식생활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습니다.
와인의 산미와 떫은맛이 당시 일본인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와인 양조 회사들은 일본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설탕이나 향료를 더한 달콤한 와인을 개발하게 됩니다.
여기에 건강에 좋다는 홍보까지 더해지면서,
고토부키야(현재의 산토리)가 만든
아카다마 포트와인(현재의 아카다마 스위트와인)이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달콤한 와인이 일본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와인은 달콤한 술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일본 와인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품종이 바로 고슈(甲州) 포도입니다.
일본 와인이 반드시 일본 고유 품종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샤르도네나 메를로처럼 본래 외래 품종이라 하더라도,
일본에서 재배하고 수확한 포도를 사용하여 일본에서 제조하였다면
일본 와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포도 품종 중에서도 고슈 포도는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슈는 근대 이후 해외에서 묘목을 들여와 재배한 품종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일본 땅에 뿌리내려 온 품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슈 포도는 일본 와인만의 개성과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품종으로 이야기됩니다.

고슈 포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에 들어온 시기는 약 1,300년 전으로 전해집니다.
이후 고슈 포도의 DNA를 분석한 결과,
약 70%는 유럽에서 오래전부터 와인용 포도로 사용되어 온 비티스 비니페라종,
나머지는 중국의 야생종인 비티스 다비디종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즉, 고슈는 일본 안에서 생겨난 품종이라기보다,
오랜 이동과 교류의 역사를 거쳐 일본에 정착한 포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10년 6월, 고슈 포도는 일본 고유의 포도로서는 처음으로
OIV(국제 포도·와인 기구)의 포도 품종 리스트에 등록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와인 라벨에 Koshu라는 품종명을 표기하여
유럽연합에 수출할 수 있게 되었고,
고슈는 일본을 대표하는 와인용 품종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슈 포도로 만든 고슈 와인의 맛은 전체적으로 가볍고 섬세한 편입니다.
향은 비교적 온화하고, 유자나 스다치 같은 일본식 감귤류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맛은 부드럽지만 신선한 산미가 있고,
마무리에는 감귤 껍질을 떠올리게 하는 은은한 쌉싸름함이 남기도 합니다.
또한 고슈는 다른 백포도 품종에 비해 당도가 크게 오르기 어려운 편이라,
알코올 도수도 비교적 낮은 경우가 많습니다.
정리하자면 고슈 와인은 가볍고 온화하며 깔끔하게 즐기기 좋은 와인입니다.
고슈는 포도 자체의 맛이 섬세한 만큼,
양조 방식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로 만들어지는 것도 하나의 매력입니다.
깔끔한 드라이 화이트 와인부터 스파클링, 오렌지 와인, 감미 타입까지,
와이너리의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여러 스타일을 비교하며 마셔보는 재미가 큰 품종입니다.

니혼슈 설명에서 떼루아(テロワール)라는 말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 떼루아(Terroir) 개념은 원래 와인에서 사용되는 말로
기후, 토양, 지형처럼 특정 지역의 자연환경이 농산물과 술의 품질에 미치는 영향을 뜻합니다.
와인은 원료가 되는 포도의 상태에 따라 품질이 크게 달라지고,
그 포도는 결국 어떤 땅에서 자랐는지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떼루아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반면 니혼슈의 원료인 쌀은 곡물이기 때문에 운반이 용이하여,
반드시 양조장 근처에서 재배한 쌀이 아니더라도
효고현 특A 지구의 야마다니시키처럼 유명 산지의 쌀을 구입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니혼슈의 품질은 양조 기술에 따라 좌우되는 부분도 크기 때문에,
그동안은 와인처럼 떼루아를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니혼슈에서도 이 떼루아가 점점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환경에 대한 의식과 함께
지역 농업과의 연결을 다시 생각하는 양조장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 고유의 주조미를 사용하거나, 지역 계약 농가와 협력하여
그 땅의 쌀을 재배하고, 그 지역의 물과 기후를 살려 술을 빚으려는 움직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떼루아 자체는 와인에서 시작된 개념이지만,
니혼슈에서도 니혼슈만의 떼루아가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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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다른 술이지만, 의외로 닮은 점도 많은 일본 와인과 니혼슈.
서양의 술이라고만 생각했던 와인이 꽤 오래전부터 일본에서도 만들어지고,
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특히 일본 와인은 단순히 일본에서 만든 와인이 아니라,
어떻게 일본에서 와인 양조를 하게 되었는지,
주로 어떤 포도 품종으로 와인을 만드는지 등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 마시면
더욱 깊은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평소 니혼슈뿐만 아니라 와인도 즐겨 드시는 분들이라면,
일본 와인도 한 번쯤 경험해보시기를 권장드립니다.
익숙한 와인 속에서 느껴지는 조금 다른 일본적인 섬세함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